커뮤니티

공지사항

기발한 저온 공학 기술이 창업 아이템이 되기까지(김건호교수님)

기발한 저온 공학 기술이 창업 아이템이 되기까지

[과학동아] 도전! 유니스트 (23) 김건호 기계 및 원자력공학부 교수

막 들어선 연구실은 당황스러울 만큼 휑했다. 학교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책상과 책장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. 책장은 아직 많이 비어 있었고, 그 옆에 ‘축 임용’이라고 적힌 화분이 두 개 놓여 있었다. “제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….” 김건호 UNIST 기계및원자력공학부 교수가 멋쩍게 웃었다. 딱 하나, 흔히 ‘거꾸리’라고 부르는 운동 기구가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연구실과 달랐다. 괜히 훤칠한 키와 체격에 시선이 갔다.

김 교수는 올해 하반기에 막 한국 생활을 시작한 젊은 교수다. 아직 실험실 설치도 끝나지 않았다(내년 초에 완성된다). 하지만 UNIST가 “김 교수를 꼭 소개해야 한다”고 추천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. 기술기업 창업이라는, 과학기술계의 ‘숙원 사업’을 앞서서 실현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국내 연구자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.

김 교수는 약품을 쓰지 않고, 오직 온도만을 세밀하게 조절해 순식간에 신경을 마취시키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해 창업을 하고 있다. 피부에 10~20초 갖다 대기만 하면 마취가 되는데, 주사바늘을 찔러 넣어도 느낌이 없을 정도로 효과가 좋다. 세포 손상이나 약물 부작용도 없고,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어 환자와 의료진 모두에게 ‘꿈의 마취술’로 꼽히던 기술이다.

김 교수의 연구는 기계공학의 열전달, 생명과학, 재료과학 분야에 걸쳐 있다. | 사진: 아자스튜디오 이서연

김 교수의 연구는 기계공학의 열전달, 생명과학, 재료과학 분야에 걸쳐 있다. | 사진: 아자스튜디오 이서연

신경세포의 온도를 정밀하고 빠르게 조절하면 마취약을 대체할 수 있을 거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의학계에서 수십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. 추운 날씨에 볼이나 손의 감각이 둔해졌던 경험을 떠올리면 쉽다. 하지만 이를 인공적으로 실현하는 게 의외로 어려웠다.

김 교수는 “인류는 높은 온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통제하는 데엔 정통했지만, 낮은 온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”며 “전공인 열 제어 기술을 이용해 온도를 급속도로 내리고 이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기술을 연구했고, 이를 바탕으로 마취용 기기를 개발했다”고 설명했다.

미국 대학 재직 시절(그는 미시간대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다 올 여름 UNIST에 왔다) 이미 의사 두 명과 함께 시제품을 만들어 동물실험을 했고, 올해 5월에는 병원에서 실제 환자들에게 적용해 효과와 안전성을 확인했다. 김 교수는 “구체적인 기술은 밝힐 수 없지만, 열전소자 재료와 구조를 최적화한 게 비결”이라며 “이제 상용화까지 대규모 임상시험과 미국식품의약국(FDA) 승인만 남겨 둔 상황”이라고 말했다.

미국 의료 시장부터 공략 예정

김 교수는 이 초고속 무약품 마취기기를 먼저 미국 의료 시장에서 선보일 계획이다. 특히 안과 분야를 첫 번째 사업 대상으로 보고 있다. 시력을 상실할 위기에 놓인 사람의 경우 주사로 안구에 약을 주입해야 한다. 이때 환자가 무의식중에 눈을 움직이기 쉽기 때문에(몹시 위험하다) 약물로 마취를 하는데, 약효가 들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고통스럽다. 김 교수의 마취기기는 조금 큰 볼펜처럼 생겼고 무게가 작은 생수 한 통 정도(500g)로 가볍다. 눈에 대기만 하면 돼 환자의 거부감이 적고 순간적으로 마취가 돼 고통도 없다. 김 교수는 “경쟁력은 확실하다”고 자신했다.

UNIST는 지난 9월 영남권의 벤처 투자사인 선보엔젤파트너스와 MOU를 맺고 기술 창업을 적극 육성하기로 했다. 국내 대학 최초로 대학 내 지주회사를 설립한 선보엔젤파트너스가 UNIST에서 처음으로 투자할 대상이 바로 김 교수의 마취 기술이다. 김 교수는 “현재 초기(seed) 투자는 거의 완료된 상태고 올해 말부터는 개발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고용할 예정”이라며 “의료기기 외에 다른 분야의 창업을 이끌 연구도 병행할 계획”이라고 말했다.

김 교수는 창업 아이템인 마취기기가 ‘생체 열전달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성과 중 하나일 뿐이라고 강조했다. 의료 기술을 혁신할 잠재력이 무궁무진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 분야에서 김 교수는 선두주자다. 김 교수는 “온도는 체내 대사와도 연결되고, 이는 수명과도 관련이 있다”며 “미래엔 인류의 오랜 꿈인 노화 분야 연구로도 확장해 나갈 것”이라고 말했다.

[연구실 人사이드] 집중력이 아이디어의 원천

흔한 질문을 했다. “다양한 전공 배경을 가진 학생이 오길 바라시나요?” 답은 “아니오.”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알고 열린 마음을 지니면 나머지는 와서 배워도 충분하다고. 부임 첫 해를 맞는 김 교수 연구실엔 아직 대학원생이 없다. 창업도 배우고 새로운 생체 열전달 분야도 선점하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! | 사진: 아자스튜디오 이서연

흔한 질문을 했다. “다양한 전공 배경을 가진 학생이 오길 바라시나요?” 답은 “아니오.” 합리적 사고를 할 줄 알고 열린 마음을 지니면 나머지는 와서 배워도 충분하다고. 부임 첫 해를 맞는 김 교수 연구실엔 아직 대학원생이 없다. 창업도 배우고 새로운 생체 열전달 분야도 선점하고 싶다면 지금이 적기! | 사진: 아자스튜디오 이서연

김건호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기자의 눈을 사로잡은 운동기구. 발목을 묶은 채 거꾸로 매달리는 기구다. 일반 가정에서라면 빨래걸이가 되기 쉽지만, 김 교수는 자주 활용한다고. 연구를 하다 피로하고 지칠 때 이용하면, 마치 자고 난 듯 몸을 개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. 미국 유학 시절부터 애용해 왔는데, 이유는 단 하나, 연구를 집중력 있게 오래 하기 위해서다.

김 교수는 “새로운 영감을 얻고 좋은 연구를 하는 데에 비결은 없다”며 “열정을 가지면 집중력이 생기고, 집중력이 생기면 오래 연구할 수 있다”고 말했다. 오래 연구하면 어느 순간 연구의 ‘스토리라인’이 보이기 시작한다고. ‘그 연구를 왜 하는지, 어떤 가치를 보여줄지’ 알게 되면 거기에서 좋은 연구가 나온다고 믿는다.

(주)리센스메디컬(RecensMedical) 연구원 모집 바로가기

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| ashilla@donga.com

<본 기사는 2016년 12월 ‘과학동아’에 “기발한 저온 공학 기술이 창업 아이템이 되기까지”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.>